ARTISTS

김인 Kim In

Biography

미술이 도대체 무엇이관데 어린 시절의 김인을 사로잡아 그의 인생을 지금의 형태로 만들었는가, 인간으로서 목숨 있는 동안 살아가는 삶과 세상 허망하기 짝이 없는 미술작품이 서로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은 있기나 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 작가 김인은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이러한 질문에 어줍지 않은 철학을 갖다 붙이는 대신 붓을 들고 자동기계처럼 그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어느 하나의 소재를 선택해서 그것의 오열을 맞추고 반복해 그리는 작업들은 한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제는 그의 독자적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별 의미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 작품들은 의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중략)


김인의 반복, 질서정연한 반복과 무질서한 반복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풍부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성한다. 볼 때마다 다른 의미가 생긴다. 

그의 그림은 다른 이와 이야기하고 싶게 한다. 도대체 당신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느냐고. 

이 반복의 화면에서 인생의 모습을 보는지, 자본주의의 단면을 보는지, 아름다움을 보는지, 슬픔을 보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김인의 반복에 대하여 - 이윤희(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Artist CV

김 인   金仁 


개인전
2021 NO REASON, 화니 갤러리. 대전
2020 끝없는 중력, 통인갤러리 서울
2019 Old bouble, 갤러리 coop.서울
2018 what this painting aims to do 갤러리41. 서울
2017 ATOPIC. 송어 낚시 갤러리, 대전
2015 반복의 무게, 통인 갤러리, 서울
2014 반복의 무게, 리앤박 갤러리, 파주 헤이리
2013 오래된 거품, 대전 롯데 갤러리, 대전
2009 소헌 컨템포러리. 대구
2006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수 없는 것. 이공갤러리 .대안공간 반지하, 대전
2005 Bound 이공갤러리, 대전
2004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수 없는것. 이공 갤러리, 대전
2003 반복의 무게, 이공 갤러리, 대전
2002 이공갤러리. 대전
2002 우연 갤러리. 대전
1990 동아 미술관. 대전

기획전
2022 A better me, a better us, 갤러리소헌&소헌컨템포러리, 대구 
2022 2인전(김인 이재옥) 가가갤러리, 서울
2021 DISCO DISCO 한강 뮤지움. 서울
2020 장난감의 반란, 청주 시립미술관, 청주
2020 the case of painting 갤러리 쿱. 서울
2017- 그리고 그리다,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 대전
     - 6인전 UHM 갤러리. 서울
2016 6전. 송어 낚시 갤러리. 대전 
2015 사랑하는 딸에게, 명랑 아트 패밀리. 홀스톤 갤러리. 대전
2014 -11개의 시선, 이공갤러리, 대전
     - 의미의 패턴, 아트 센터 화이트 블럭, 파주 헤이리
2013 지속가능한 도시-꽃, 스페이스씨, 대전 
2010 다섯 개의 시선, 달리아 갤러리, 싱가포르
2009- 섬과 맞서는 전술. 대안공간 충정각, 서울
     - art in life. 포도몰, 서울
     - 열린 미술관 Window Media 전. 대전 창작센터, 대전
     - 라라 사티 옥션. 싱가포르
2008 대전 시립미술관 10next cord 전. 대전
1999-2003 당위 전/ dmac 전 대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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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의 반복에 대하여



- 이윤희(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작가 김인은 꽉 다문 입매에 매서운 눈빛을 가진 예술가이다. 십여년전 나는 처음 김인 작가를 나 자신의 일터였던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유망한 청년작가들을 선발하여 각각의 개인전 형식으로 개최하는 기획전에서 만났다. 당시 삼십대 후반의 김인은 뭔가 독기가 덜 빠진 것 같은, 사회에 불만이 많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작품은 크고 어지러웠다. 갖가지 일상의 기물들이 거대한 하늘의 모습인지 그저 평면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화면 위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나에게 재미있었던 것은 그 큰 화면을 앞에 두고 결과적으로 어지러울 것이 분명한 사물들의 세부를 공들여 그리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화면에 불을 지르거나 토하듯이 물감을 붓는 행위가 그의 인상에는 더 맞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는 세심하게 그리는 편을 택했다. 



거대한 화면에 둥둥 떠 있거나 서로 얽혀있는 사물들의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도 눈길을 끌었다. 그림의 내용이 아름답다거나 기법이 신기할 것도 없는 그 그림들은 전시실을 지나갈 때마다 발걸음을 붙잡았다. 볼 때마다 처음 보는 그림 같은 느낌이었다. 전날에 찬찬히 보았다고 생각했어도 다음날 처음 보는 부분들이 나타나서 다시 시간을 들여 보게 되는 작품들이었다. 



작품 감상에 들이는 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다. 어떤 작품은 일초 만에 작품 전체가 완벽하게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한 번 보고나서 두 번 볼 필요까지는 없다고 느끼는 작품들도 있다. 또 어떤 작품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자폐의 표면처럼 보는 사람의 시선 자체를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런가하면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다가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작품들도 있다. 김인의 작품이 그런 경우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림 안에서 드러나지 못하고 감추어져 있는 어떤 기운에, 예기치 못한 지점에서 폭발할 것만 같은 어떤 기운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김인의 작품은 원래의 작품이 가지고 있던 어지러운 구도를 버리고, 한 가지 소재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작가의 아들이 폐품을 이용해 방학숙제로 만든 젖소를 화면 가득히 반복하는가 하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작은 공룡 피규어가, 아톰의 얼굴이나 본체에서 떨어져나간 주먹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반복을 한다는 것, 별다른 상징성을 가지지 않을 것 같은 사물들을 반복해서 그리는 것은 아마도 작가 자신의 발목을 붙들어 끝내 놓지 못하게 하는 질문들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미술이 도대체 무엇이관데 어린 시절의 김인을 사로잡아 그의 인생을 지금의 형태로 만들었는가, 인간으로서 목숨 있는 동안 살아가는 삶과 세상 허망하기 짝이 없는 미술작품이 서로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은 있기나 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 작가 김인은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이러한 질문에 어줍지 않은 철학을 갖다 붙이는 대신 붓을 들고 자동기계처럼 그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어느 하나의 소재를 선택해서 그것의 오열을 맞추고 반복해 그리는 작업들은 한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제는 그의 독자적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별 의미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 작품들은 의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동일한 사물들이 화면 속에서 열을 맞추어 서 있는 것은 어쩐지 위협적이다. 장난감 로봇이거나 인조장미이거나 인형의 머리이거나, 질서정연할 이유가 없는 것들이 딱 부러지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사물들의 의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느낌을 가중시키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김인이 그려내는 사물들이 대부분 정면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인형이나 로봇은 물론이고, 인간 형태의 사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물의 정면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반복되어 그려져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낮선 군대를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그 사물들 가운데 많은 부분은 처음 보는 것들, 그러니까 그의 아들이 독창적으로 만든 장난감 같은 것들이 섞여 있어 더욱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려진 형태 하나하나가 공격적으로 생기지 않았지만 같은 사물이 반복되는 현상은 공격적이다. 예기치 않은 연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도 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는 영향력이 없을 것이 분명한 이들이 한 마음이 되어 외치는 구호 같은 것, 하나로는 힘이 없지만 서로 연결되었을 때 위력이 생기는 쇠사슬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인형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손의 제스쳐는 더욱 상징적인 힘이 세다. 인형의 꼭 쥔 주먹이 반복되거나 브이(V) 형태의 손짓이 반복되었을 때 그것은 거센 항의나 완벽한 승리의 의미를 담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로서도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다보면 그것이 가진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관객 역시 자연히 떠오르는 감흥을 억제할 이유가 전혀 없다. 따라서 그는 사물의 질서정연한 반복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의미를 획득하였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반복이라는 것이 꼭 질서정연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김인이 동일한 사물을 반복하여 그리는 연작들 가운데 최근작인 새와 자동차를 소재로 한 것은 기존의 질서정연함을 헤치며 들쭉날쭉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 작품들은 앞서의 것들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른바 명품 브랜드의 차들이지만 연식이 언제일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화면 속의 차들은 서로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너무도 무질서하게 빼곡해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차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새들도 마찬가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하나 어여쁜 모양을 하고 있지만 날갯짓조차 어려울 정도로 갑갑한 공간에 갇혀 있다. 이동을 위해 몸부림을 친다 해도 서로에게 부딪쳐 다칠 것 같은 형국으로 작은 새들이 넘치게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첫 눈에는 화면 속의 차들이나 새들이 가득한 화면에서 추상적인 미감을 얻게 된다. 때깔 좋은 차들이 화면의 부분 요소로 작동하면서 부분들이 모인 전체는 화려한 추상작품 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개별적인 차를 식별하게 되고 이 차들이 모인 풍경이 어딘지 이상한, 어쩌면 불길한 재난의 풍경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새들 역시 마찬가지, 총천연색이 난무하는 풍경을 이룬 새떼들의 움직임은 어딘가로 황급히 도망가는 움직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풍자적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그는 애초에 말했던 것처럼 “별 거 아니다”라고 말 할 것인가?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사실 관객에게 일차적인 감상의 자료가 될 뿐이다. 그가 차 한 대 한 대를 그려내면서 자동차에 대한 애호를 표현한 것인지, 새 한 마리 한 마리를 정성껏 그리면서 머릿속으로는 무념무상 내일의 스케줄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지 아닐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림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떠한 해석도 그리는 자의 내면을 완전히 읽어낼 수는 없다. 바로 그렇게, 그의 그림이 일차원적으로 해석될만한 그 어떤 의도도 노출시키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보는 이의 시간을 붙들어 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김인의 반복, 질서정연한 반복과 무질서한 반복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풍부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성한다. 볼 때마다 다른 의미가 생긴다. 그의 그림은 다른 이와 이야기하고 싶게 한다. 도대체 당신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느냐고. 이 반복의 화면에서 인생의 모습을 보는지, 자본주의의 단면을 보는지, 아름다움을 보는지, 슬픔을 보는지에 대해서 말이다.